피비 제더카이어에게. 안녕하세요, 피비. 갑작스러운 편지에 놀라지는 않았을까 싶지만, 딱히 편지라기보단 계약 이행을 위한 보고서에 가까우니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피비는 워낙 정이 많으니 남한테 분양한 퍼프스캔의 안부도 걱정할 것 같아서 말이죠. 일단 피비는 잘 지내고 있어요. 집에 돌아오면 동생들이 있어서, 혹여나 눈에 띄어 이건 무슨 동물이냐고 물어보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어요. 방에서 나갈 수는 없어도, 침대 머리맡이나 창틀―물론 만일을 대비해 피비가 자유롭게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는 창문을 항상 닫고 있답니다―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면서 운동도 하고 있는 것 같고요. 먹이는 곡물 위주로 주고 있는데 자는 사이에 제 코를 파가는 게 틀림없어요, 요즘은 코가 영 안 막히거든..
에녹 Z. 윈터우드에게 그렇지 않아도 편지를 해야 하나 아주 잠시 고민했는데, 런던에 없을 거 같아서 잠시 미뤄두고 있었어요. 편지 내용을 보아하니 런던에 다시 온 모양인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에녹은 본가보다 런던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혼자 지내고 있다는 건, 집에 정말로 혼자라는 건가요? 당신은 시끄러운 걸 좋아하니까 혼자라면 꽤나 외롭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보고 싶다고 해도, 굳이 외롭고 심심한 에녹을 위해 시끄럽게 떠들거나 요란하게 놀거나 할 수는 없겠지만...... 하루종일 늘어져 잘지도 모르고요. 물론 그보다 근본적으로, 잠은 잘 자고 있는지, 청소는 잘 하고 있는지, 밥은 잘 해먹고 있는지, 옷은 제대로 빨아 입고 있는지 몰골이 참 기대되네요. 물론 혼자서도 잘...
01 헬렌,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겠죠? 멍청한 소리. 모리아티, 학교에 가더니 날이 갈수록 멍청해지는구나. 네 아버지는 감옥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니. 네가 사람이라도 죽여서 잡혀 가면 감동적인 모녀 상봉을 소재로 영화 한 편 정도 찍을 수 있겠지. 아! 너는 이미 불쌍한 마르가리타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넌, 미성년자잖아? 02 모리아티는 해가 갈수록 레이디 헬렌의 헛소리가 심해진다고 생각했다. 제가 학교에 가서 배워 오는 같잖은 수작에 비례하는 것처럼 말이다. 1994년 여름, 웬일로 마중 나온 헬렌과 함께 역에서 한 시간 정도를 걸어 밸런타인 스트리트에 들어서자 다 내려앉았던 몇 건물들이 말끔하게 철거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낡고 냄새나고 더러운 거리는 고작 건물 몇 채 없어졌다고 숨통이..
* TMI 아버지는 오러였다. 호그와트에 오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를 수도 있었을 사실이다. 모리아티 론은 그의 얼굴을 본 적도, 그의 인격이 어땠는지도, 그의 마법 실력이 어땠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동시에 아버지는 감옥에 갇힌 범죄자였다. 입학하고 두 달이 지났을 때 두 살 위인 그리핀도르의 여학생 라리에트가 이유를 알려주었다. 아버지가 ‘그’를 따랐던 자들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했다. 이해되지 않았다. 실은 ‘그’ 가 누구인지도 모리아티는 몰랐다. 다만 제 성정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려니 짐작했을 뿐이다. 소녀가 자란 곳은 무법지대였고 애초에 정의는 없는 것에 가까웠다. 라리에트가 지독히도 제게 시비를 걸어대는 이유 또한 모리아티는 이해하지 못했다. “범죄자 새끼.” 다시 목소리가 울린다. “네..
* 짧고 급합니다... 도저히 시간이 안 나 시간을 여행했습니다. 죄송합니다. (T_T) 에녹 사랑해... 1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열 달이 지났지만 새롭지 않은 세상, 안개가 내리깔린 무력함의 소굴, 좁은 창으로 보이는 별도 없는 밤하늘, 걸음을 들일 때마다 삐걱이는 마루 같은. 모리아티 론은 집에 도착해 편지를 날리자마자 침대에 쓰러졌고 그대로 몽중에 들었다. 세 시간 후, 혹시나 하여 열어 둔 창틀에 진 그림자만 아니었더라도 모리아티는 다음 날 정오가 넘어 일어났을 것이다.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수면욕이 어서 다시 눈을 감으라고 소녀를 재촉한다. 허나 그림자의 정체가 부엉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시 잠에 빠지기란 아무리 상도덕 차리지 않는다 해도 너무한 일..
급하게 쓴 흔적이 보이는 듯한 글씨. 다시 말하면, 알아먹기 힘들게 쓰여 있다는 뜻이다. 내용은 결코 길지 않았으나 장수가 세 장이나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왠지 모르게 모리아티가 지금까지 어떻게 과제 분량을 채워 왔는지를 엿볼 수 있다. 록사나 N. 프레데리크에게 곧 기차역으로 갈 시간이에요. 물론 록사나는 나보다 기차역에서 멀리 사는 것 같으니, 감안해서 제가 출발하는 것보다는 조금 일찍 보냈어요. 왜 편지를 보냈는지 대충 짐작하겠죠? 록사나의 편지가 도착하면 이 편지는 바로 태워 버리고 정성스레 답장을 쓸 준비를 무려 지금까지! 하고 있었답니다. 이렇게 된 거, 지난 방학의 내 기분을 록사나가 한 번 체험할 기회가 왔네요. 방학은 잘 보냈나요? 오, 내 방학이 어땠는지를 묻고 싶을 테지만 답..
알아요?내가 왜 행복한 사람들을 싫어하는지. [외형] @commission_Jinu 님의 커미션 그림입니다. 긴 은발을 항상 풀고 다니는 이유는 거리에서처럼 남자애인 척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본인 기준, 왼쪽으로 치우친 가르마. 동그란 이마. 눈꼬리가 날카로워 눈을 치뜨면 조금 험악해 보이나, 젖살이 올라 동글동글한 얼굴 덕에 그렇게 사나운 인상은 아니다. 높지는 않은 콧대에 작달막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어 고집스러워 보인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도 놀랍도록 말랐다. 관절마다 툭툭 튀어나와 끌어안으면 아프다. 맨바닥에 앉아도 뼈가 부대껴 아프다고 한다. 어깨는 맞는데 와이셔츠 품은 크고 허리는 맞는데 둔부에 살이 없어 일직선으로 뚝 떨어진다. 덥다는 ..
아시어스가 거리를 방문한 지 며칠 후, 그의 집으로 부엉이가 날아왔다. 부엉이는 잠시 아시어스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응시하다가 다시 날아갔는데, 부엉이를 보낸 이가 편지를 쓰는 내내 짜증 아닌 짜증―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올 생각을 하죠? 왔는데 편지만 두고 갈 거면 대체 왜 온 거죠?―을 냈기 때문이었으나 아시어스가 알아챌 수 있는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무지에 최대한 단정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이는 글씨체. 아시어스 무어에게. 편지는 잘 받았어요. 물론, 그걸 '잘 받았다' 고 말해도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아시어스가 귀한 몸 이끌고 직접 이 누추한 거리까지 와 줬다는 것에 대해 아주 감사하고 있으니까 그 점을 걱정하지는 말아요. 지난 해에 편지가 끝없이 반송된 건 아시어스의 잘못이라기보단 ..
편지지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 힘든 평범한 무지에, 적어도 자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글씨체. 중간에 잉크의 색이 한 번 바뀐 것으로 보아 순식간에 써내린 글은 아닌 듯하다. 로완 B. 달링에게. 안녕하세요, 로완. 아마도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저번 방학 때는 따로 편지하지 않았었으니까요. 잘 지내고 있나요? 로완이야 앞바다에 나가서 돌멩이를 줍거나 집에서 평범하게 낮잠을 자는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안부 정도는 전해 주세요. 예쁜 돌멩이를 주운 게 있는지도 알려 주고요. 아, 혹시 제가 먼저 편지를 보냈다고 해서 제가 로완을 좋아할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말해도, 좋아하는 걸 들키는 게 부끄러워서 굳이 언급하는..
아마도 당신이 집에 도착한 것과 비슷하게ㅡ혹은 그 조금 전, 혹은 그 조금 후ㅡ도착한 편지. 내기에서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빌린 듯한 슬리데린 후배의 부엉이가 편지를 툭 떨구고 갔다. 에녹 Z. 윈터우드에게 방학은 잘 보내고 있겠죠. 실은 이걸 묻기도 뭐한 게, 얼굴 본 지 고작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앞으로의 방학을 잘 보내라는 인사를 하는 게 맞겠죠. 짐을 덜 싸서 급히 기숙사로 돌아가는 통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했으니까. 아무튼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간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에녹네 집으로 찾아갈 수 있겠지만, 조금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학기 동안 동생들이랑 놀아 주지도 못했으니 그것도 풀어 줘야 할 것 같고. 다음 주 주말 즈음에 집에 갈 수 있을 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