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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어땠어?" 모리아티 론에게 누군가 묻는다면 즉시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시끄럽고 번잡하고 짜증났어요." 원래가 좋은 일도 나쁘게, 기쁜 일도 아닌 척, 즐거울 때도 부러 뚱한 표정을 짓고 마는 성정이었으나 그것을 잘 모르는 이는 이렇게 대꾸해줄 것이다. "역시 집 벗어나면 고생이지. 네가 학교 같은 곳 간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온 거리를 걷는 모리아티는 속으로 생각한다. '개소리. 그래도 여기보다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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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크로스 역은 붐볐다. 모리아티는 인조 가죽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짐가방을 발치에 둔 채 답이 정해져 있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달갑지 않지만 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으니 헬렌 하우스로 돌아가긴 해야 한다. 학교에 간다고 방학 때마저 거리를 벗어나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로버트와 로제타 쌍둥이가 성탄절 방학에 돌아가지 않은 것은 물론 편지 한 통 하지 않았다고 볼이 퉁퉁 불어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꼬맹이들 비위 맞춰주기만큼 귀찮은 것이 없다. 사람이 사라지고 이웃이 바뀌는 일이 드물지 않은 거리인지라 제가 마주치는 이들마다 "모리아티, 살아 있었니?" 하고 놀란 듯이 물어볼지도 모른다. 어쩌면 레이디 헬렌이나 로버트도 자신이 학교에 간답시고 어디 고래잡이 배에 팔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소녀는 천천히 걸어 역을 빠져나왔고, 짐가방이 무거운 탓에 두 번은 내려두고 쉬면서 걸어야 했다.
02
모리아티의 집인 셈인 헬렌 하우스는 밸런타인 거리 구석에 위치한 삼 층짜리 여관 건물이다. 거주인은 총 여섯 명으로, 간혹 여관이라는 간판의 목적에 부합하게 돈을 받고 숙박객을 들이기도 하나 빈민가로 여행 올 이는 물론 돈을 내고 이부자리를 찾아들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대개는 모든 방이 비어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길에 들아서자마자 마주친, 저를 보고 죽은 사람을 외치며 눈을 휘둥그레 뜬 구두닦이 꼬맹이―자신과 동갑이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준 것을 제하면 헬렌 하우스의 문 앞까지 도달하는 데 특별한 방해물은 없었다. 길 건너 다 무너져가던 일 층짜리 건물 두어 개가 웬일인지 말끔한 새 건물로 단장한 것을 빼면 거리는 떠나기 전과 똑같았다. 허나 끼익대는 문을 힘겹게 열고 현관에 무거운 가방을 쿵 하고 내려뒀을 때, 모리아티는 무언가 달라지긴 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일 층의 거실에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것도 모자라 사람들이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모리아티 누나!" 누가 왔나, 생각하기가 무섭게 새된 목소리가 비명에 가깝게 들려왔다. 이어 낡은 나무바닥을 박차고 달려와 제게 폭 안기는 작은 몸뚱이에 확 밀려 제가 방금 열고 들어온 철문에 등을 쾅 박고 말았다. 표정을 구기며 내려다보자 저를 올려다보는 동그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일 년 새 제 허리 조금 위까지 오던 로버트가 가슴께까지 컸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제가 얼마나 집을 오래 비웠는지 깨달아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로버트는 질문을 쏟아냈다. 누나! 편지 왜 안 보냈어? 거긴 전화도 없어? 내가 누나 죽은 줄 알고 로제타랑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학교엔 방학이라는 게 있다는데 왜 집에 안 왔어? 거기서 뭐 했어? 누나? 누나? 누나! 누나!
10분 후, 모리아티는 거실에 앉아 낯선 얼굴 셋을 마주하고 있었다. 건장한 몸을 가진 덩치 큰 사람 하나, 대비되게 마르고 비실댈 것 같은 인상 하나, 중간 정도 하나. 꼭 균형을 맞춰 뽑은 것마냥 크기가 다른 셋은 정부에서 시행하는 도시 재생 사업의 예비 조사를 하기 위해 일주일 정도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하기야 다른 곳보다 이 건물이 그나마 모양새도 좋고, 주인도 험악한 인상의 깡패가 아닌 레이디 헬렌이니 숙박지 선정은 합리적으로 한 것 같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짧게 대꾸한다. 도시 재생 사업이요...... 그렇군요. 힘내세요. 특별히 기대하기도 싫지만요.
03
방학이 시작되고 일주일간은 잔 기억밖에 없다. 다 떨어진 이불을 덮고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자는 통에 레이디 헬렌은 정말 열두 살짜리 꼬맹이가 골병이라도 들었나 싶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몇 년 전 제가 방에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놓은 출입금지 엄포를 아직도 지키고 싶은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모리아티가 제 방에 들어와 물건 하나라도 건드리면 노발대발 화내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정말 자고 일어나서 방문 앞에 있는 식사를 하고 다시 멍하니 있다가 자는 일상을 반복하는 것은 감옥에 수감된 죄수에 가까운 꼴 아닌가. 어느 날 오후 다섯 시에 모리아티는 눈을 뜨고 누운 채로 이 방탕하고 무기력한 루틴의 원인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열어둔 창문에 부엉이가 사뿐하게 내려앉았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소녀는 생각했다―어쨌든 이곳을 벗어나야겠어.
04
편지지가 없어서 구걸하던 걸인의 철그릇을 털어야 했다.
물론 몇 푼 있지도 않았지만! 거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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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모리아티 론이 친구 아닌 동기들과 한 약속을 지킨 이유는 딱히 지킬 약속이었던 것이 아니라, 생기 넘치던 호그와트에서 우울만이 짙게 깔린 거리로 돌아온 것이 제 이상할 정도로 과한 수면의 원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모리아티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냥, 놀러 나오고 싶어서요. 망토를 걸치는 것은 좀 낯선 꼴이니 망토를 뺀 셔츠와 교복 바지만 입었다. 뭔가 입을 옷이 없나 옷장을 뒤져 봐도 당연히 교복보다 말끔해 보이는 옷은 없었다. 옆구리에 천을 덧대 기운 셔츠나 어쩔 수 없이 낡아서 자락이 너덜한 바지. 멜빵바지 두 개는 그나마 멀쩡해 보였으나 키가 큰 탓에 로제타에게 그대로 물려줘야 했고, 발목까지 오는 긴 연보라색 원피스는 잠옷이라 입고 나갈 만한 옷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말했던 대로, 그 이후 여름 내내 소녀는 바빴고 종종 헬렌 하우스를 비웠다. 호그와트에서 만난 애들 집에 놀러 간다며 거리를 나서는 모리아티를 보는 로제타와 로버트의 표정은 말 그대로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는 광경을 발견한 사람의 표정이었고, 레이디 헬렌의 얼굴은 그보다는 조금 나았으나 기쁨과 놀라움, 그리고 걱정이 한데 섞인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뭘 봐요, 그렇게 꼽냐? 저를 배웅하는 셋을 노려보다 고개를 홱 돌려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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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방학 동안 세 번을 외출했고, 로제타와 로버트는 이제 모리아티가 자신들과 놀아주지 않는다며 잔뜩 뚱한 표정이었지만, 거리를 나가 사 온 사탕을 하나씩 쥐어 주면 다시 배실거리며 모리아티를 쫓아다니곤 했다. 물론 그런 사탕보다 돌아와서 건넸던 루시드의 장난감을 훨씬 좋아하긴 했지만―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여하튼 기특하게 자란 꼬맹이들이다. 종종 셋은 잠들기 전 여관 문 앞에 앉아 더러운 거리와 뿌옇게 내려앉은 밤하늘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학교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 밤엔 쌍둥이가 결국 모리아티의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눈물을 터트렸다. 다시 안 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울어? 손을 뻗어 가볍게 두 사람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여하튼 다음 날 아침 출발할 때까지도 로버트는 꽁해 있었다. 너 언니 이렇게 보내면 후회한다? 로제타가 허리에 손을 얹고 꾸중하듯 로버트에게 말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로버트는 한참 모리아티를 노려보다가 제 방으로 달려가 문을 쾅 닫아 버렸고, 레이디 헬렌과 로제타는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모리아티를 배웅했을 뿐이다.